0.
호주에서의 직장생활을 얘기하려다 보니 취업과정부터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단 시작해 보기로 했다.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쥐뿔만한 경험과 주변 사례들을 바탕으로 생각 나는대로 끄적이는 거라 정리도 안 되어 있고 두서도 없으니
(그럴 리 없겠지만) 이걸 지침으로 삼는다든지 하면 곤란하다. --;;;
1.
IT 뿐만 아니라 호주의 모든 구직은 인맥으로부터 시작된다.
빈 자리가 났을 때 채용하는 우선 순위는 내부인력 > 직원 추천 > 공개채용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계 기업도 알음 알음 인맥을 통해 취업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호주에서는 인맥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하다.
인맥을 통한 구인이 어려울 때에야 비로소 공개 채용으로 눈을 돌리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레퍼런스 체크를 반드시 한다.
인맥을 통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호주 내 동종업계에서 경력이 있으면 건너 건너라도 아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라 평판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국내 기업만 다녔던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엄청난 불이익을 안고 시작하는 셈이다.
외국계 글로벌 기업을 다녔을 경우 호주 지사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 인맥을 잘 활용해야 한다. 오픈 포지션이 있으면 추천해 줄 수도 있고 레퍼런스 체크시에도 호주에 있는 사람이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레퍼런스 체크는 매니저나 팀원, 동료 등 데이 투 데이로 일을 같이 해본 사람만 가능하다.
처음에 그걸 몰라서 한명은 대충 아는 사람 썼었는데 인사담당자가 레퍼런스 체크를 해보고 나서는,
같이 일한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며 다른 레퍼리 달라고 해서 한국에 있는 예전 매니저로 레퍼리를 바꿨다.
(보통 레퍼리는 두명 이상 필요한데 이력서에다가는 Available upon reuest 라고만 해두고 나중에 달라고 하면 그 때 알려주면 된다)
2.
하지만 토종 한국인에게는 인맥보다 더 심각한 언어 문제가 있다.
아무리 한국에서 영어를 잘했고 외국계 기업에 오래 다녔고 해외출장을 많이 다녔어도
영어권 학교를 나왔거나 영어권에 살아보지 않은 이상 99.9%는 언어의 장벽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100%라고 하고 싶지만 혹시나 천명 만명 중에 한명 있을까봐)
영어는 취업할 때도 문제지만 취업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걸림돌이 된다. 취업을 해야 그나마 영어가 느는데 영어를 못해서 취업을 못한다는 슬픈 현실 ㅠㅠ
영어가 빨리 늘려면 무조건 말을 많이 해야 하지만
말하기 싫어하고 말주변도 없는 나같은 사람은
(문법이 어느정도 된다는 전제 하에) 영어로 책이나 뉴스 등을 소리 내어 읽는 게 좋다.
발음이나 입 근육 훈련에 좋은 것은 물론이고
꾸준히 하면 몇 주 안에 귀가 번쩍까지는 아니어도 확실히 리스닝에 많은 도움이 된다.
미드나 영드 대사를 따라하는 것도 좋다는데 그건 귀찮아서 안해봤지만 안 좋을 수가 없을 듯.
인터뷰 준비를 위해 이력서와 자기 소개를 여러 번 읽고 전공분야와 관련된 문서를 꼭 소리내어 많이 읽으면
관련 단어나 많이 쓰이는 표현들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문법이 약할 때는 무조건 문장을 달달 외우는 것도 좋다. 생각을 안해도 문법이 뇌에 배이게 하는 방법인데, 이건 어릴 때 했던 거라 성인에게는 얼마나 효과가 있을 지 모르겠다.
소리내어 읽는 것 외에도 무조건 많이 읽어야 하는데 개인 블로그나 이런 거 말고 공신력 있는 신문사나 출판된 문서를 추천한다. 되도록 미국 사이트 말고 호주 사이트로.
미국 영어와 호주 영어는 발음과 철자만 다른게 아니다. 단어 선택이나 문장 구조도 차이가 많이 나서 처음엔 그냥 읽고 이해 하는 것도 쉽지 않다. ABC가 그나마 좀 쉽고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좀 어렵다.
모르는 단어, 말장난, 속어도 많은데, 안 그래도 익숙치 않은 발음에 이런 모르는 단어들까지 더해지니 더더욱 멘붕이 온다. 처음엔 다들 발음만 문제인 줄 알지만 알고 보면 글로 써놔도 뭔소린지 모른다는...
3.
보통 구인하는 회사에 직접 지원하는 경우보다 서치펌을 통하는 경우가 많은데, 서치펌의 이력서 필터링을 통과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이력서를 잘 쓰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데 스킬맥스라는 코스를 들으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한국에 있을 때 외국계 기업에 다니기도 했고 지원도 많이 해봤기 때문에 이력서는 잘 쓴다고 생각했었고
그 때 쓰던 이력서를 여기 입맛에 맞게 약간 고쳐서 썼는데, 지금 그 이력서를 다시 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다.
지금 다시 쓰면 아마 그렇게는 안 쓸듯. 여기서 일을 좀 해보니 어떻게 써야할 지가 좀 보이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포지션마다 다르게 맞춤 이력서를 써야 하는데
보통응 귀찮아서 몇가지 템플릿만 만들어 놓고 무조건 지원해 버린다. 이력서를 수십통 보내도 답이 없는 가장 큰 이유.
채용하는 입장에서 입맛이 당길만하게 써야 하고, 쓸데없이 장황하게 늘어 놓지 않고 간결하지만 흥미로울 부분을 잘 부각해서 써야 하고,
1차 서류 심사는 전문 지식이 없는 서치펌이나 인사팀에서 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채용 공고에 나온 키워드들이 들어가게 써야 한다.
그리고 절대 절대 맞춤법이 틀리면 안된다.
이력서 쓰기 귀찮아서라도 짤리지 않는 한 회사 못 옮길 것 같다 --;;;
4.
이력서를 통과하고 나면 서치펌에서 1차로 전화가 오는데 보통 캐쥬얼하게 전화하는 것 같지만 이게 1차 인터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거 통과하기가 또 하늘의 별따기.. 이력서를 수십장 수백장 돌려도 서치펌 전화 한 통 받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렵게 전화 한 통 받더라도 버벅거리다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많다.
한 번은 쇼핑센터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심한 호주 억양인데다 주변 소음까지 겹쳐 잘 못 알아 들어서 전화 건 애가 짜증을 냈다. 물론 그 이후 연락 없었음 ㅠ
서치펌에서 보통 1차 전화 -2차 대면 인터뷰를 하거나 1차 전화 인터뷰만 한 후
괜찮다 싶으면 채용회사에 이력서를 보내고 서류가 통과되면 또 전화나 대면 인터뷰를 한다.
보통 실무는 대면, 인사는 전화를 많이 하는 것 같다.
나는 총 세 군데 면접을 봤지만 한 번도 시험 같은 걸 본 적은 없는데,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기술 면접을 강도 높게 보거나 시험을 보는 경우도 있고,
개발자의 경우 과제를 주고 시간 안에 프로그램을 작성하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취업 경험담은 여기
http://dorabori.tistory.com/post/24
http://dorabori.tistory.com/post/25
5.
가장 좋은 취업 방법은 한국에서 외국계 기업을 다니다가 호주 지사로 트랜스퍼하는 것이다.
경력도 다 인정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채용 1순위는 내부 인력이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 백만배 유리하다.
경력을 대부분 인정받으니 연봉도 비교적 높은 편이다. 잡 타이틀에 따라 최저 연봉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타이틀 그대로 오면 더 바랄 게 없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이런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글로벌 기업의 아시아 본부가 대부분 호주에서 싱가폴로 옮겨가고 호주 지사가 축소되면서 요즘엔 로또 1등할 운이나 되어야 가능한 방법인 것 같다.
아직 간간히 보이긴 하지만 이미 영주권을 받아 놓은 경우라면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고 있다면 호주 지사에 빈자리가 나는지 수시로 체크하고 호주에 있는 관련 부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면 좋을 듯.
요즘은 싱가폴로 트랜스퍼하는 경우가 많은데 싱가폴도 괜찮을 것 같다. 더운 날씨와 비싼 차값과 인구밀도를 감당할 수 있다면.
업무 강도와 진상 고객, 조직 문화 모두 한국과 호주의 중간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살아보지 않아서 잘은 모른다.
싱가폴로 우선 트랜스퍼했다가 호주로 가는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다. 호주로 바로 가는 것 보다 오히려 쉬울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영어로 일하고 아시아 본부에서 일한 경험 좀 쌓으면 한국에서만 일한 것보다 훨씬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
그럴만한 여건이 안되는 대부분의 사람은 맨땅에 헤딩하는 수밖에 없다.
링크드인에 미리 미리 인맥좀 만들어 놓고 이력서 쓰는 방법 숙지하고
여기저기 지원하는 것보다 진짜 자기가 될 것 같은 포지션만 골라서 심혈을 기울여 맞춤 이력서를 작성하고
커버레터도 맞춰서 잘 쓰고 인터뷰 때 할 자기 소개 경력 위주로 준비하고 (채용공고에 해당 되는 사항 강조해서)
자기가 했던 프로젝트 술술 설명 잘 할 수 있도록 연습하고 뭐 그런 뻔한 방법으로 준비하면 된다(...)
보통 seek.com.au에서 많이 채용 공고를 보지만 요즘엔 알짜배기 포지션들은 링크드인에 많이 올라오는 것 같다. 링크드인 채용공고는 채용 회사에서 직접 내는 경우가 많고 연결된 인맥들을 볼 수 있어서 구인 구직 모두에 도움이 된다.
아무런 연고 없이 호주 오기 전 한국에서 채용되어 오는 경우도 아주 드물게 있긴 한데, 이건 자기 경력이랑 채용 포지션이 아주 딱 맞는데다 호주에 그런 경력을 가진 사람이 없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능력뿐 아니라 운이 어마하게 좋은 경우나 해당된다.
오자 마자 취업할 자신이 없다면 대학이나 TAFE에 다니는 것도 방법이다.
일단 교수라는 무시 못할 인맥이 생기고 처음 와서 어리버리할 때 적응하기도 좋고, 호주에서 학위가 있으면 아무래도 조금은 유리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교수 추천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호주 IT에 대한 약간의 힌트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TAFE 는 다 아는 걸 가르쳐서 재미 없다는 사람도 있으니 이미 전문 지식이 있고 여건이 된다면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을 듯.
6.
한국에서 회사 그만두고 중간 중간 놀 때도 그랬지만 취업 전엔 길거리에서 사원증 달고 돌아다니는 회사원들이 엄청 부러웠다. 회사 다니기 지겹고 짜증날 때는 가끔 그 때를 생각하며 그래도 회사 다니고 있는게 어디냐며 위안을 한다.
사무실이 너무 추워서 밖에 커피 마시러 잠깐 나왔다. 며칠 동안 비가 계속 오다가 오늘 맑은 하늘을 보니 새삼 시드니에서 살고 있다는 게 너무 좋다.
지저분하고 길 막히고 사람 많고 비싸고 복잡하지만 나는 그래도 시드니가 좋다. 서울이나 분당보다도 좋고 멜번보다도 좋다.
요즘 프로젝트 때문에 자주 오는 마틴 플레이스 앞 맥쿼리 스트리트.
마틴플레이스는 반대쪽. 여기부터 아래로 보이는 광장이 모두 마틴플레이스.
지금 일하고 있는 건물 화장실에서 본 풍경. 맨 왼쪽 손톱만한 오페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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