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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직장생활

[호주 직장 생활] 회사 사람들 이야기 2. 수다쟁이 호주인들

1. 나는 한국에 있을 때도 말이 거의 없는 편이었고
여기 와서는 당연히 더 없다.

한국에서는 지나가다 마주쳐도 아주 친하지 않으면 그냥 안녕하세요 인사만 하고 가는데

호주에서는 아주 어색한 사이가 아닌 이상, 안부부터 시작해서 주말에 뭐했냐 요새 뭔 일하냐 날씨가 어떻고 어젯밤에 경기가 어떻고 주절 주절 말을 엄청 많이 한다.

이제 다 끝난 줄 알고 가려는데 상대방은 계속 더 얘기를 하곤 해서
가다 말고 어정쩡한 자세로 계속 서서 끄덕 끄덕하거나
그냥 어색한 웃음만 짓는 경우가 많다. -_-

주제도 뭐 거의 똑같다.

말주변 없는 나는 월요일이면 주말에 뭐했냐,
금요일이면 주말에 뭐할거냐, 물어보고
화-목은 침묵.

가끔가다 휴가 가는 애 있으면 어디로 가는지
여행 계획 좀 들어주고.

2. 요즘에는 사무실에 거의 안 가고, 우리 팀 사람들도 매니저랑 PM 말고는 사무실에 거의 없어서
사무실에 가끔 가보면 친한 사람들이 없고 심지어 모르는 사람이 삼분의 일 정도 된다.

그러다보니 회사에서는 이제 거의 말을 안하고 일 얘기만 한다.
고객사에 나가면 말 많은 사람 반, 말 없는 사람 반인데
지금 프로젝트 하는 고객사에 있는 다른 벤더들이 말이 너무 많아서 귀찮아 죽겠;;;

집중해서 일해도 겨우 끝낼만한 일인데다
이것 저것 문제도 많고 환경도 복잡해서 실수하기 쉽고 정리가 안되는데
자꾸 앞뒤에서 말을 시키고 한번 시작하면 끝날 줄을 모르니 짜증이 난다.

하루는 진짜 엄청 바쁘고 중요한 날이었는데
앞에 앉은 애가 자꾸 말시켜서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대답했더니
집중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그 후론 말을 많이 안 건다;;; 좀 미안하긴 했음.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선 더더욱
사람을 안 쳐다보고 말하는 건 매우 무례한 일인데
집중하고 있을 때 흐름을 놓치면 헷갈려서 실수하기 쉽기 때문에 뭐 어쩔 수 없었다.

뒤에 앉은 애는 엄청 친절하긴 한데
친절한 애들이 대체로 또 수다스럽기도 하다.

지난 주 금요일에는 관심도 없는 남아공 식당 얘기를 하는데
지도랑 메뉴까지 찾아가며 열심히 수다를 떤다.
나는 계속 끊고 일하려고 하는데 자꾸 뒤에서 주절 주절;;;

3. 호주에선 회식을 거의 안하기 때문에 사실 이렇게 틈틈이 하는 잡담을 통해 친해져야 하는데
워낙 말하는 것도 싫어하지만 대화 주제도 참 지루한 것들 뿐이라
끼어들기가 쉽지 않다.

초기보다는 나아졌지만 지금도 농담은 못 알아듣거나 알아들어도 뭐가 웃긴지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남들 웃는거 따라 웃어야 할 때도 많다.

영국인들은 그나마 좀 나은데
내가 입사할 때 인터뷰 했던 영국 출신의 M은
말도 잘하고 아이디어도 기발하고 유머감각도 있어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리버풀 출신인데 억양은 표준 영국 발음이다 (적어도 나한텐 그렇게 들림).
말도 참 알아듣기 쉽고 발음도 또박또박해서 초기엔 자주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같은 팀이지만 하는 일이 세일즈로 바뀌면서
좀 세일즈스러워 졌다고나 할까;;;(나쁜 뜻으로)

근데 목소리랑 억양이 베네딕트 컴버배치랑 좀 비슷하다.
얘도 참 수다스러운 편인데 말을 재미있게 잘하기 때문에 별로 귀찮지는 않다;;;

얼마 전에 엄청 오래된 집을 샀는데
영국에서 은퇴하고 여행 온 어떤 핸디맨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나 집에 묵게 해 주면서
오천 달러 내에서 수리나 인테리어 등 할 수 있는 것을 해달라고 협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못하는 게 없어서
페인트 칠도 새로 해 주고 배관도 고쳐주고 이것 저것 뜯어 고쳐주고 했는데
이미 그 가치가 오천불은 훨씬 넘었다고.

그러다가 벽에서 벽돌 하나를 뜯어냈더니
그 안에서 백 몇 년 전의 시드니 모닝 헤럴드 쪼가리가 나왔는데
그 날짜가 발견한 날이랑 정확히 같은 날이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

4. 우리팀의 다른 영국인 D는 무진장 독특한 사람이다.
얘도 발음은 전형적인 영국 발음인데 M보다 더 영국 억양이 강하고 조금 더 서민스럽다 =_=

우리 팀에서는 미친 과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길가다 버려진 티비 따위를 줏어와서 분해 후 고쳐서 쓰질 않나
다 쓴 OTP 토큰으로 로봇을 만들어 아들이랑 놀지를 않나
하여튼 이상한 짓을 많이 한다.
근데 전공은 경영학이라는;;;;

성격도 좋아서 사람들이랑 잘 지낸다. 맥주를 엄청 좋아해서 이사 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동네 펍을 찾는 일이다.

D에 대한 고객의 평가는 둘로 나뉘어지는데
격식이나 시간, 약속, 계획 등을 중시하는 고객들은 별로 안 좋아하고
좀 캐주얼하고 느슨한 고객들은 좋아한다.

기발하고 실력도 뛰어나지만 약간 자기 스타일대로 일하는 성격이라
업무 시간에 이발을 하러 간다든지
어제 한 일이 계획보다 잘 돼서 오늘 굳이 올 필요가 없다 생각되면 다른 일을 하러 가는데 PM한테 말을 안하고 간다든지
굳이 사무실에서 안해도 되는 일이면 주로 호텔에서 일을 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실력이 좋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일을 계획대로 다 하지만 격식을 중요시하는 고객들은 별로 안 좋은 인상을 가지기도 한다.
대신 결과만 중시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고객들은 매우 좋아함.

뭐 다른 팀원들이랑 나는 좋아한다. 재미있고 기발하고 신기하고 편하니까.

5. 기왕 영국인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다른 팀에 있던 또다른 영국인 M 이야기.

지금은 퇴사하고 없지만 기술지원 팀의 터줏대감 같은 사람이었는데
엄청 잘난체하고 틈만 나면 다른 사람 욕하고 (주로 멍청하다고) 업무시간의 반은 수다로 채우곤 했다.
주로 남의 욕 아니면 음식 얘기.

대부분의 농담은 Sarcastic하고 남의 철자 틀린건 더럽게 욕하면서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들어보니 자기도 엄청 잘 틀렸다고;;;

그 사람은 D와는 반대로 격식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했는데 일하는 건 잘 못봤고
내가 본 거라곤 모든 일에 대해 이건 기술지원 팀이 할 일이 아니라고 한 것 밖에 없다.

하여튼 재수없는 영국인의 표본 같았던 사람임.

그러고 보니 나도 남의 욕만 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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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뜬금없는 사진 투척. 보타닉 가든쪽에서 바라본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라 현재 핸드폰 바탕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