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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생활

[호주 생활] 호주 이민 10년

이민 온 지 만 10년이 지났다. 10년이면 뭔가 감회가 새로울 줄 알았는데 전혀 일절 그런 거 없다.

만 5년 됐을 때만 해도 이것 저것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이런 글을 썼었는데 (호주 이민 5년, 착각과 현실)
다시 읽어보니 대부분 지금도 해당되는 얘기이고 조금 생각이 달라진 부분도, 조금 더 깨달은 것들도 있다.

호주 IT 직장에 대한 생각
호주에 와서 회사를 세 군데 다녀봤다.

첫 번째는 미국계 글로벌 벤더사.
이 회사는 복지가 좋은 편이었고 사람들도 꽤 괜찮고 똑똑한 편이었다. (다른 벤더들도 보면 특히 필드나 세일즈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똑똑하고 기술력이 있다)
매니저들도, 전체적인 분위기도 괜찮았고 프로젝트 매니저는 복불복. 생각해보면 여기 뿐만 아니라 프로젝트 매니저는 어디나 복불복이고 괜찮은 PM은 반도 안 되는 듯.

두번째는 호주 로컬 은행.
이 회사는 돈은 많이 안 주는 대신 연말에 주식을 좀 준다. 나는 1년도 안돼 그만두는 바람에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만 받았지만.
여기는 똑똑한 사람과 아닌 사람이 반반인 것 같고 그 편차가 좀 심하다. 분위기는 세 회사 중 제일 좋았고 정치적 알력도 있지만 팀 내 분위기는 최고. 다들 친근하고 가족적이며 뭔 일만 있으면 펍 런치에 농담 따먹기도 많이 하고 매니저도 다혈질이지만 좋았음.

하지만 결정적으로 일이 재미 없었다.... 루틴한 운영업무는 체질에 잘 안 맞는다.

세번째는 대형 글로벌 컨설팅회사.
여기는 졸업생들 꿈의 직장이라 공채로 뽑은 신입사원들은 대부분 엄청 똑똑한데 경력으로 뽑은 사람들은 복불복이다. 위에 은행도 좀 그런 경향이 있지만, 은행에선 경력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대부분 능력있는 사람들이었던 반면, 여기는 경력으로 사람 뽑기 어려워서인지 경력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괜찮은 사람 반, 아닌 사람 반, 일부는 뭐 저런 게 다 있나 할 정도로 무능력한 사람들까지도 있다.

전에 한 번 디렉터 대신 신입사원 그룹 면접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지원자들보다 내가 더 떨었다.
과제 주고 10분 후 토론하는데 어찌나 다들 말을 잘 하는지 와 정말 대다나다 라는 말 밖에는..

이 회사는 딱 월급 말고는 1원도 더 없다. 복지도 거의 없다시피하고 그래서 실질적인 소득은 첫번째 회사보다 더 적다.
일도 많고 조직이 수직적인 편이고 (물론 한국하고는 비교가 안되지만 앞의 두 회사와 비교했을 때) 별로 재미도 없고 분위기도 별로.. 가식적이고 끼리끼리인 문화.

여기는 신입사원이나 주니어들이랑 꼭 같이 팀을 꾸려 프로젝트를 해야하다보니 정말 마음에 안 드는 결과물이 나올 때가 많은데,
가르치며 하려니 속터지고 내가 하려니 시간이 모자라고 찝찝한 상태로 항상 프로젝트를 끝내게 된다. 혼자 일하는 게 훨씬 낫다.

디렉터들이나 파트너들도 괜찮은 사람 반 아닌 사람 반인데, 아닌 사람들은 정말 심각하다 싶을 정도로 아니라서 시간 낭비에 스트레스에 결과물 폭망의 쓰리콤보. 특히 디렉터 잘못 만나면 헬 오브 헬. 직속 디렉터 (코치라고 함)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마다 디렉터가 바뀐다.

영어에 대한 생각

어떤 날은 회사 가서 인사 말고는 한 마디도 안하고 올 때도 있을 정도로 심하게 말이 없는 편인데
이렇게 말이 없는 사람은 영어, 특히 스피킹을 늘리기가 굉장히 힘들다.

그래도 직장을 다니면 회의도 해야 하고 전화도 해야 하기 때문에 개미 발톱만큼씩 늘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는 만족할 만큼은 안 되는 것 같다.

몇년 전부터 영어로 된 책만 읽고 있는데, 혼자 있을 때는 주로 소리를 내서 읽고 있다.
소리내서 읽으면 입도 풀리고 (?) 말하는 연습도 되는 건 당연히 알겠는데 의외로 리스닝도 덩달아 아주 좋아진다. 게다가 책은 대부분 문법에 맞는 문장이니.. 올바른 문장으로 말하는 게 익숙해 지게 된다.

책을 많이 읽으니 당연히 읽는 속도도 빨라지고 독해능력도 더 좋아진다. 특히 IT 는 계속 공부해야되고 검색해야 되는데, 쓸만한 자료는 대부분 영어로 돼 있기 때문에 영어를 빨리 읽는 게 매우 중요해서, 소리내어 읽을 환경이 아닌 때라도 되도록 많이 읽어서 속독 능력을 키우는 게 좋다.

문장을 많이 접하니 쓰는 능력도 아마도(?) 알게 모르게 좋아졌겠지? 하지만 이건 회사에서 문서와 이메일을 워낙 많이 쓰다 보니 거기서 오는 게 더 클 것 같긴 하다.

어쨌든 소리내어 책 읽기는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가 한방에 해결되는, 내가 경험해 본 최고의 방법인 것 같다.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
책이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신문이나 뉴스를 읽는 것도 좋다 (ABC, The Guardian, SMH, The Age, The Australian 등).

한달 정도 하루 30분-1시간씩 꾸준히 하면 확실히 말하는 게 혀도 부드러워지고(,,) 편해지며 들리는 것도 훨씬 잘 들린다.

(그러다가 한 1-2주 정도 쉬면 다시 혀가 굳음)

어쨌든 그 결과 지금은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훨씬 편해졌다.

이민에 대한 생각
확실히 한국에서 여자로 사는 것 보다는 호주에서 여자 + 아시안으로 사는 게 훨씬 낫다. 전에도 말했지만 호주에도 인종차별 성차별 다 있는데 (심지어 서구사회 치고 둘다 심한 편인데) 둘 다 합쳐도 한국에서 받던 성차별보다는 훨씬 덜하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직장 문화라든지 인간에 대한 존중이라든지 다른 여러가지 사회적 문화적 차이들이 우리 성향에 더 잘 맞는다고 할까. 그런 이유로 결론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1도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