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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직장생활

[호주직장생활] 호주 IT 이야기 - 5. 서비스, 개인의 가치, 할일은 한다 등등

​1. 서비스의 가치

한국에서 굳이 직장생활을 안 해봐도 한국에 오래 살아 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한국에서 서비스=공짜의 개념이 강하다.

IT도 예외가 아니라 별것도 아닌 제품 하나 사 놓고는 공짜로 요구하는 것들이 엄청 많다.
기본적으로 <돈 주고 물건을 샀는데> 당연히 이정도는 해줘야 되지 않냐 하는 마인드이다.

호주에서는 모든 서비스는 다 돈이다. 돈을 낸다고 다 해주는 것도 아니고 미리 서로 약속한 만큼만 해 준다. 거기서 더 요구하면 돈을 더 내야 한다.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하는 일이 회사에 돈을 벌어다 주는 경우와, 회사에 돈은 안되지만 고객이 우겨서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경우, 같은 월급을 받는다 해도 업무 만족도에 엄청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당연히 품질면에서도 많은 차이가 난다.​

​2. 개인의 가치

우리 회사는 개인주의가 심하지 않은 편이다.아닌가? 하여튼 전에는 고객 > 회사 > 팀 > 개인 순으로 우선 순위를 두라고까지 한 적도 있다.

그런 우리 회사도 프로젝트 할당할 때 개인의 휴가 일정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고객사에서도 프로젝트 일정 계획을 세울 때 팀원들의 휴가부터 먼저 챙긴다. 멜번에서 처음 장기 프로젝트를 할 때 고객사 프로젝트 매니저가 중간에 휴가를 가 버리는 걸 보고 뭥미? 했었는데 여기서는 일반적인 일이다.

한국에서 프로젝트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하루나 이틀 어쩔 수 없이 내는 휴가 말고 일주일 이상의 휴가를 프로젝트 중간에 간다고 하면, 쟤는 회사 나가겠다는 얘기구나, 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프로젝트 중간에 3-4주 까지도 간다. 갑자기 가는 건 아니고 미리 계획해 놓아야 하지만.

장기 휴가를 가더라도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업무 인수 인계도 잘 안한다. 담당자가 휴가를 가서 어떤 업무는 그동안 마비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_=
물론 중단된다고 해도 큰일이 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지만, 한국에서는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오바하는 일도 여기서는 며칠에서 몇주까지 지연되어도 괜찮은 경우가 많다.

사실 대부분의 업무는 몇 주 지연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회사가 망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직원의 휴가나 건강따위는 모든 사소한 일 중에서도 가장 사소해서, 언제든 무시해도 좋은 가치를 가진다.

호주에서는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본인이나 가족이 아프면 병가를 내는 게 일반적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가도 불편해 하고, 특히 감기나 독감 같이 전염성일 경우 회사에 나가면 민폐라고 생각하고 사람들도 싫어한다.

또 한 가지, 지난번 글의 댓글에도 썼지만
데이터 센터 출입시 호주는 반드시 클로즈드 슈즈(앞뒤가 막힌 신발, 샌들이나 슬리퍼 금지)를 신어야 한다. 안전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가 본 모든 한국, 태국, 싱가폴 데이터 센터들은 슬리퍼로 갈아 신거나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먼지나 흙 따위가 들어오면 기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양말만 신거나 슬리퍼를 신으면 미끄럽고 벗겨지기 쉬워서 무거운 장비를 옮길 때 위험하다. 장비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부상도 더 심하게 당하는 건 당연하다.

별 것 아닌 차이 같지만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가 확연히 드러나는 단적인 예이다.

​3. 고객도 할일은 한다

하드웨어 솔루션의 경우 대부분의 회사에는 랙 작업을 하는 인력이 따로 있다. 어떤 회사에서는 안전을 이유로, 지정된 인력 이외의 사람이 장비를 설치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도 하다.

소프트웨어 솔루션의 경우, 고객이 OS 및 필요한 소프트웨어, 데이터베이스 설치를 다 해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경우 그만큼 시간을 더 배당하고 돈을 더 받는다. 고객의 준비 미흡으로 인한 프로젝트 지연은 벤더가 책임지지도 않고, 고객도 벤더를 비난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일정이 늘어날 경우 다시 추가 계약을 한다.

설치가 끝난 이후에는 필요한 교육을 몇 시간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고객이 다 알아서 한다. 교육도 한두시간 짜리 약식 교육이 아닌 제대로 된 제품 교육은 돈을 내고 받아야 한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OS부터 다 설치해 주기를 바란다. 공짜로. 그리고 운영도 자기가 안하는 고객이 많다. 설치해 놓고 한 번도 안 들여다 보는 고객도 있다. 문제 생기면 무조건 벤더를 부른다. 패스워드는 기억도 못한다.

이런 식이다 보니 갑에서 IT 일을 하던 사람은 경쟁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벤더 쪼는 일 뿐. 그래서 호주로 기술이민을 와서 취업을 하려면 을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훨씬 유리하다.

​4. 할일만 한다

여기서는 업무 이외의 잡일은 거의 없다. 물론 비용 처리나 고과 입력 같은 건 해야 하지만, 자기랑 상관 없는 건 하지 않는다.
원래 자기 업무가 아닌데 무슨 상부 보고 자료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도 없다.

상사에게 보고가 필요하면 주로 메일로 보고를 한다. 프로젝트에서 설계 문서가 나오면 담당자들과 상위 관리자들이 같은 문서를 검토하고 승인을 한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회사는 국내 기업 중에서도 보고서에 목숨을 거는 회사였는데,
엄청난 고급인력들이 3-4명 모여서 한달 동안 파워포인트 보고서를 만들고,
본부장 보고 후 본부장의 입맛에 맞춰 한,두달 동안 수정하고,
대표이사 보고본으로 몇 장으로 요약된 수정본을 또 한달 동안 만든다.
그리고 나서 또 한달 동안 그룹 보고본을 만든다.
참 엄청난 인력 낭비가 아닐 수 없다.​​

​5. 할 수 있는 일만 한다

엔지니어나 개발자가 적성에 맞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도 계속 그 일을 할 수 있다.
나이 들었다고 자동적으로 좋은 관리자가 되는 게 아니니, 적성에 맞든 안 맞든 개나 소나 관리자를 하지는 않는다.
적성에 맞고 잘 하는 사람들이 관리자를 하다 보니 좋은 관리자들이 많다.

물론 관리자나 PM이 아닌데 나이가 많으면 새로 취업할 때 불리하긴 하지만 경력이 좋고 조건이 맞으면 치명적인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지금 한국에 다시 돌아간다 해도 직장을 구할 수도 없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다.

사람 대접도 여기서 더 잘 받고 있고,
사람 사는 맛도 여기서 더 많이 느끼고,
가치관에 반하는 일은 훨씬 적게 일어나고,
밥맛 떨어지는 인간들도 훨씬 적고,
일하는 보람과 재미는 훨씬 크고,
삶의 만족도도 더 크고,
화내는 일은 훨씬 적고,
성격이 여유있고 좀 너그러워진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은 어떨 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호주가 훨씬 잘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