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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생활

[호주 생활] 호주 이민 5년, 착각과 현실

0.

호주에 온 지 만 5년하고도 두달이 다 돼간다.
호주에서의 직장은 한달 있으면 5년. 5년 근속 선물도 받았다.


여행가방용 저울. 고를 게 몇가지 없었는데 그나마 쓸만한 거. 지금 회사 관두면 반납해야 하나 -_-

심심해서 옛날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호주 온 지 2년 됐을 때 쓴 글을 봤다. 1년 증후군에 대한 내용으로, 2년 됐을때도 살짝 비슷한 증세가 나타나서 쓴 글이었는데 다시 보니 새롭다. 그런 날도 있었구나.

보통 이민 10년차가 되면 다시 돌아가고 싶어진다고들 하는데, 아직 전혀 그런 생각은 들지 않고 아마 1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1.

당연하겠지만 처음 1년은 어리버리하게 지나갔다. 뭐하나 제대로 아는 것도 없고 문화 충격, 물가 충격, 언어 충격도 겪다보니 (누구나 경험하는 내가 이렇게 영어를 못했던가의 충격) 주눅이 들기도 한다.

아주 간단하게는 핸드폰 사는 것부터 시작해서
대중교통 이용하기, 장보기, 면허따기, 렌트 구하기, 차 사기, 전기, 가스, 전화, 인터넷 연결하기 등등 처음엔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처음 와서 한 뻘짓과 뻘짓으로 날린 돈을 생각하면 눙무리 앞을 가린다.

뻘짓 1 전화와 인터넷

뻘짓 2 보증이란

뻘짓 3 인터넷쇼핑


(티스토리 앱으로는 링크가 안 넣어지나요 ㅠ)

1년이 되는 시점에 누구나 겪는 1년차 증후군이라는 게 있는데 뭔가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허전하면서, 향수병도 아니고 외로움도 아니고 권태도 아닌 뭐라 표현하기 힘든 기분이 된다.

옛날에 써놓은 글을 보니까, 이룬 것도 없고 호주 애들 떡실신도 못시켰고 영어는 여전히 헤매고 뭔가 기대에 못 미쳐서 아쉬운 그런게 아닐까 생각된다고 했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2년차에도 그런 생각이 좀 들었었는데 그 이후로는 안 들었던 것 같다.

한국에 자주 들어가서 그런지 별로 한국이 그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남편은 1년쯤 지났을 때는 한국에 갔다오고 싶어했는데 한 번 갔다오더니 그 다음에는 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고 한다.
굳이 휴가 쓰고 돈 들여서까지 갈만하지는 않고, 출장 보내주면 군소리 없이 가는 정도.

한국 음식은 처음 1-2년간 많이 아쉬웠는데 지금은 뭐 없으면 없는대로 해먹기도 하고, 오년 전보다 한국 식품이 다양하게 수입되기도 해서 진짜 요새는 허니버터칩이랑 간장게장, 굴 말고는 아쉬운 게 별로 없다...
허니버터칩이 그렇게 맛있다는데 언제 들어오려나. 호주에 들어오는 것보다 아마 내가 출장가는 게 빠르겠지.

2.

직장생활은 나중에 따로 글을 쓸 생각이지만, 처음 1년간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리버리했던 것 같다.
문화도 다르고, 한국에서 하던 일과도 좀 다른 일이었고, 문서의 종류나 내용 같은 것도 많이 다른데다, 무엇보다 언어가 다르다보니 잘 못 알아듣는 것 뿐 아니라 문서 읽고 쓰는데 두배 이상 시간이 걸리는 등 어려움이 많다.

직장 생활 얘기하자면 정말 하고싶은 말이 많은데 시작하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엄두가 안난다.
나중에 비행기나 기차에서 할일 없을 때 조금씩 써 둬야지.

3.

인터넷, 스마트폰 등으로 한국 소식을 한국에 있는 내 친구들보다 더 잘 알고 한국 티비도 많이 보고 하다보니 옛날 이민자들보다는 훨씬 쉬운 것 같다. 게다가 호주는 시차도 1-2시간 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연락하기도 편하고 거의 모든 뉴스 등도 실시간으로 알게 된다.

전화 통화도 070 인터넷 전화로 하면 시내 전화요금만 내거나 무료로 통화할 수 있고 필요하면 영상 통화도 할 수 있는데다 멀리 있다는 이유로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부모님께 더 자주 연락을 드리게 된다.

친구도 몇 명 없지만 그나마 있는 친구들은 한국에 갈 때마다 보니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자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친구들은 내가 가야 모인다 =_= 지들끼리 더 자주 보지도 않음.

한국과 시차가 별로 없고 거리가 가깝다는 것은 호주 이민의 장점 중 하나이다. 호주야 워낙 다른 나라들과 다 멀지만,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서양권 나라가 호주이다보니.

4.

오기 전의 막연한 생각,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생각, 지금의 생각이 조금씩 다른 부분들이 있다.

​<​​​사람들의 성향>

오기 전/ 온 직후:
호주 사람들은 착하고 미국 사람들은 거만하고 까칠.

지금:
그 반대. 미국 회사라 미국에 가면 미국 사람을 많이 만난다 (당연한 말을). 내가 만나 본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유쾌하고 농담도 잘하고 심하게 긍정적인데 =_= 호주 사람들은 알면 알수록 까칠함.
물론 한국에 있을 때 본 호주인/미국인들을 근거로 그렇게 생각했었던 거니까 미국에 가서 걔네랑 생활해보면 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거다. 근데 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우리 외삼촌도 그렇게 말한 걸 보면 어느정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치/사회>

오기 전/ 온 직후​:
호주가 미국을 닮아간다고 해도 노동당이 집권한 나라인 만큼 어느 정도는 진보적이겠지.

지금:
오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노동당 개판나고 보수당이 집권. 적어도 현재 미국 정부보다는 훨씬 보수적이고 퇴보적 성향이 있음. 은퇴하면 뉴질랜드로 갈까 생각도 해봄.

​​​​<IT와 기술/인력 수준>

오기 전​​/온 직후 취직 전:
IT 선진국인 한국에서 왔으니 와서 직장만 잡으면 떡실신 시키며 승승장구 하겠지.

​​취직 후​:
호주 애들 무지 똑똑함...! 나만 바보임. 짤릴까 걱정하면서 다님. 한국이 IT 선진국이라는 건 다 개뻥임. 소비자용 하드웨어와 네트웍 말고는 호주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음. 신기술 수용속도는 호주가 훨씬 빠름.

지금​​:
똑똑한 애들과 멍청한 애들의 편차가 엄청 심함. 대학을 나와 IT에 근무하는 애들은 대부분 다 똑똑함. 멍청한 애들도 가끔 있지만 아주 드물게 보임.

​​​​<영어>

오기 전/ 온 직후​:
영어는 걱정 안됨. 한 두달 지나면 적응되고 6개월이면 완벽 영어를 구사할 것임.

​​지금​:​
한번도 외국에 안 살아본 30대 이상의 성인이 네이티브 스피커가 된다는 건 불가능함. 발음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님. 발음은 후져도 조리있게 말 잘하면 절대 무시당하지 않음. 말 많은 사람이 빨리 늘음.
그리고 우리도 맞춤법/문법 많이 틀리듯이 여기 애들도 문법이나 철자 많이 틀림. 무작정 따라하면 안됨. 회사 다니려면 발음보다는 문법이 중요함. 문서나 메일에서 철자나 문법 틀리면 무식해보임.

(직장생활 5년 해보니) 영어는 직장에 다녀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늘음...하지만 나처럼 화사 가서도 한마디도 안 하고 오는 날이 많으면 안 늘음. 회의를 많이 해야 함.

​​​<이웃과 친구>

오기 전/ 온 직후​:
별 생각 없었음.

​​지금​:
그래도 이렇게까지 없을 줄은 몰랐음. 원래 히키코모리 습성이 있어서 별로 아쉽지는 않지만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함.

<​​​​인종 차별>

오기 전/ 온 직후​​:
미국이나 캐나다보다 심하다고 들었음.

지금​:
어디 살고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름. 동양인들이 많은 지역은 대체로 괜찮음. 나는 안 당해봤지만 시내에서 욕 들어봤다는 사람은 봤음. 가끔 대중교통에서 인종차별 발언을 해서 동영상 뜨고 욕 먹거나 처벌 받는 경우가 있음.
그런데 토니 애벗이 차별 금지법을 완화하겠다고 해서 난리가 났었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음. 하여튼 매사에 도움이 안됨.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한국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경향도 있음.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인데 공항에서 자기만 짐 검색을 한다거나 마트에서 동양인만 짐 검사를 한다거나 하는 것.
공항 검색은 나도 처음엔 맨날 나만 부르길래 차별하나 했는데 그냥 정말 랜덤임. 앞에 사람 다 검사하고 다음에 나오는 사람 그냥 검사함.
마트는 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보통 큰 가방이 있으면 검사함.

​​​​<여성 인권>

오기 전/온 직후:
당연히 좋을거라 생각.

​​지금​:
가장 많이 실망한 부분임. 물론 한국보다는 훨씬 낫지만 서양권에서는 최하위가 아닐까 생각됨. 남녀의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도 심하고 가정 폭력 성폭력 등도 많이 일어남.

또 뭐가 있더라.. 생각나면 또 쓰겠음.

물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이 생각도 바뀔 수 있을 것 같다.

10년차에 한번 더 써봐야지.